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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미인 "양귀비"
    ──•▶세상 돋보기/옹알 장독대 2009. 6. 6. 21:55

    중국의 미인 "양귀비"

      
    
    

    중국 외교부가 공식 소개한 양귀비의 초상화

     
    

    중국에서는 뛰어난 미인을 침어낙안, 폐화수월(沈魚落雁 閉花羞月) 이라고 표현한다.

    미모가 너무 뛰어나 물 위에서 놀던 물고기가 부끄러워서 물속 깊이 숨고,

     

    하늘 높이 날던 기러기가 아름다움에 반해 날개짓을 하는 것을 잊고 있다가 땅으로 떨어지며,

    이쁘게 핀 꽃이 무색하다 생각되어 다시 꽃잎을 닫고 휘영청 밝은 달이 구름 뒤에 숨는 다는

    뜻이다. 5천년 중국역사에 보면 많은 미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하여 오늘날까지 중국 역사의 4대 대표미인으로

    꼽히는 미인들이 있으니 춘추(春秋)말엽 월나라의 왕(越王) 구천(勾踐)이 미인계를

    쓰고저 오나라의 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친 서시(西施)와 한(漢)나라의 원제(元帝)가

    흉노와의 평화를 위해 흉노족에게 시집 보냈던 궁녀 왕소군(王昭君),

     

    삼국(三國)시기 동한(東漢)의 왕위를 넘보는 간신 동탁(董卓)을 제거 하기 위해

    그의 양아들 여포(呂布)와의 관계 이간에 파견되었던 초선(貂禪), 미모에 반해

    당(唐)나라의 현종황제가 후궁으로 삼은 며느리 양옥환(楊玉環, 훗날 귀비에 책봉되었기에

    楊貴妃로 불림)이다.

     

    미모가 꽃을 무색케 한 양귀비(양옥환)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685~762) 때인 719년,

    경국지색(傾國之色), 절세가인(絶世佳人)의 상징인 양귀비(楊貴妃)가 태어났다.

     

    본명이 양옥환(楊玉環)인 그녀는 빼어난 미모와 총명함 그리고 가무에 뛰어난 솜씨를 지녀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시대의 흐름을 바꾸면서 일세를 풍미하다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현종은 조모인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뒤를 이어 당시 권세를 장악 하고 있던

    안락공주(安樂公主) 태평공주(太平公主) 일파를 타도하고,

    28세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현명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민생 의 안정을 꾀하며

    국방을 튼튼히 하고 경제를 충실히 하면서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이루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정사(政事)를 등한히 하게되고 도교(道敎)에 빠져 막대한 국고를

    소진하였으며,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마저 죽자 마음을 둘 곳 없어 하던 차에,

    아들인 수왕(壽王)의 비(妃)가 되어있던 양옥환이 무혜비를 닮고 미모가 수려하여

    눈여겨보고 있다가 35세나 연하였던 양옥환과 역사적인 인연을 만들었다.

     

     위 초상화는 실제 양귀비가 살았던 중국황제의 별장,당화청궁(唐華 淸宮)에 걸려있는 그림이다.

    양귀비는 체중이79kg이나 됐다고 한다.

    
    
    화청궁과 화청지
     
    

    楊貴妃와 唐 玄宗이 로맨스를 즐겼던 화청지와 화청궁이다.

    장안의 여산을 背山으로 자리하고 있는 華淸池 華淸宮 당대의 최고 시인이었던

    이백(李白)이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을 정도로 절세의 미인이었던 양옥환은

     

    비파 연주솜씨가 뛰어나 현종의 딸인 함의공주 결혼식에 연주자로 참석했다가

    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눈에 띠게 되어 17세에 수왕의 비로 간택된다.

     

    수왕은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현종의 18번째 왕자였는데,

    양옥환은 수왕의 비였다.

    훗날 아들의 왕비가 된 양옥환의 어여쁜 자태에 마음을 빼앗긴 현종 을 본 측근 환관은

    양옥환의 두 몸종을 매수하여마음을 돌리도록했다.

     

    결국 황제의 권세를 선택한 양귀비는 수왕을 떠나기로 결심하였고,

    며느리의 신분인 양옥환과 바로 결합할 수 없었던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옥환의 뜻이라 하여 양옥환을 출가시켜 여도사 (女道士)로 만들었다.

     

    당시 22살이였던 양옥환은 현종으로 부터 태진(楊太眞)이라는 호를 받고 남궁에 거처하면서

    세인들의 눈을 피해 현종과 은밀히 만났다.

    양귀비가 거처하던 남궁을 태진궁이라 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이다.

     

    아들 수왕의 비를 빼앗은 현종 은 죄책감을 느껴서였는지 위씨의 딸을 보내어 비로 삼게 하였다. 그뒤 양옥환이 27살 되던 해 현종은 양옥환을 궁에 불러 들이고 귀비(貴妃)로 책봉하였다.

     

    궁중의 법도상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 이었으나 당시 황후가 없었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행세를 했다.

     

    양귀비와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내며 세월 가는 줄 모르던 현종은 온천수가 솟아 나오는 곳에

    양귀비를 위한 화청궁(華淸宮)을 지어 주고 겨울철마다 그곳에 같이 머무르며 함께

    목욕도 하며 해가 하늘 에 높이 솟아올라도 떨어질 줄 모르고 깊은 사랑의 늪에 빠져 들었다.

     

    일찍 부모를 여윈 양귀비는 양(楊)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가게 되었 는데,

    양귀비의 환심을 사려한 현종은 양귀비의 친척들을 차례차례 관직에 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죽은 아버지는 물론 오빠들에게도 관직을 내리고 세 언니들도 각각

    한국부인, 괴국부인, 진국부인에 봉해 자신의 옆에 머무르게 하였다.

     

    특히 양귀비의 양오빠인 양소 에게는 신임을 더 두어 양국충(楊國忠)이라는 이름까지 내리고

    후에 이림보가 실각하자 재상직을 주기도 했다. 그뒤 현종은 날로 정치에서 멀어졌다.

     

    개원 24년(736)부터 천보 연간에 걸쳐 조정에서는 간신이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고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당왕조의 정치는 부패 일로를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양귀비에 빠진 현종은 위기의식 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당 왕조를 쇠퇴의 길로 떠밀었으며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安史의 난),

    양귀비와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 (長安)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에게도 죽음을 강요하였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양귀비는 길가의 불당 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양귀비의 묘
     
    

    양귀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정사(正史)는 그녀를 "자질풍염(資質豊艶)" 이라 적었으며,

    절세(絶世)의 풍만한 미인인데다가 가무(歌舞)에도 뛰어났고,

    군주(君主)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백(李白)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白居易)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曲)으로 하여

    《장한가 (長恨歌)》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진홍(陳鴻)의 《장한가전(長恨歌傳)》과 악사(樂史)의 《양태진외전 (楊太眞外傳)》 이후

    윤색(潤色)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꽃이 양귀비를 보고 부끄러워 꽃잎을 닫은 것과 관련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루는(현종을 만나기 이전) 양귀비가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무성하게 꽃이 핀 모란과

    월계화 등을 보고 덧없이 지나가는 청춘을 아쉬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꽃아! 꽃아! 너는 해마다 다시 피어나지만 나는 언제나 빛을 보겠느냐?"라는

    한탄과 함께 눈물을 흘리하면서 그 꽃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꽃받침이 오그라들고 꽃잎이 말려들어갔다.

     

    그녀가 만진 꽃은 바로 함수초(含羞草)였던 것이다. 이때 한 궁녀가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

    그후 그 궁녀는 가는 곳마다 "양귀비가 꽃과 아름다움을 견주었는데 꽃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고 소문을 내었으며, 여기에서 "수화(羞花)"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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