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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성문화 변천
    ──•▶자아 채우기/마음의 양식 2018. 9. 4. 11:28

    우리 나라의 성문화 변천

    가. 원시 시대
    우리 나라에서도 여성이 제사를 주관하였으며, 무속 신앙에 나오는 산신, 풍신, 용신, 태양신도 여성이었고, 신라의 일급 호국신 중 나림(奈林), 혈예(穴禮), 골화(骨火)의 세 산의 신도 여성이었다. 또 삼신 할머니, 청실홍실 할머니 등의 이야기는 원시 시대에 씨족 내의 대소사에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게 해준다.

    나. 자유스러웠던 고려 시대 여성

    고려의 여성들은 여름이면 시냇물에 들어가서 남녀 구별 없이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고 절에도 마음대로 갔으며 귀천을 막론하고 이른바 '쉽게 만났다가 헤어질 수 있는' 풍토였으므로 마음대로 어울려서 구경을 했다. 그러므로 여자의 재혼도 별로 흉이 되지 않았다. 고려는 '정절 숭배' 풍토가 아닌 이상, 처녀들의 자유 연애가 지탄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고려가요>의 주제가 남녀의 사랑에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다. 조선 시대

    조선 초기에는 결혼 후 남자가 여자 집에서 일정 기간 동안 생활하는 풍속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보통 혼인 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낳아 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성들은 또한 자녀 균등 상속을 통해 경제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조선 전기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실 소생일 경우 아들과 딸의 구별 없이 같은 양의 재산을 분배하고 그 가운데 대를 잇는 아들에 한해서 상속분의 5분의 1을 더해 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비교적 평등하던 여성의 지위는 17세기 후반이 되자 변모하기 시작했다. 재산 상속에서도 차등을 강화시켰다. 점차 장남 우대, 남녀 차별의 경향이 강화되어 나갔다. 본부인의 딸이 받는 재산보다 첩의 아들이 받는 재산이 많은 경우도 빈번해서, 이제는 처첩보다는 남녀간의 차별이 더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성은 가족 안에서 남존여비에 입각한 열등한 예속적 존재가 되었고, 시집을 가면 출가 외인이 되는 동시에 남편의 종속적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제 3대 임금인 태종은 과부가 재혼을 하면 그 자식들은 그 당시 관직 등용문인 과거시험에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다. 이는 재가하는 것을 부도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콩쥐 팥쥐>,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의 전래 동화에서 계모는 욕심이 많고 강한 여자이고 본처의 자식을 구박하는 형식으로 묘사된 점도 여성의 재혼을 간접적으로 금지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다가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사회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과부 재가금지법을 만들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적 본능조차 억제하면서 여성들이 열녀관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비천한 시집의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정책적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혜택을 주는 것 때문에 열녀가 되도록 은근히 시집 식구들로부터 압력을 받기도 했다.

    이것이 한 때는 여성이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져 사주단자가 오고가다 남자가 죽어도 열녀가 되어야 했고, 엉겁결에 손목 한 번 잡힌 것도 몸이 더럽혀졌다고 자살하는 사례가 많아서 임진왜란 때는 효자(67명)나 충신(11명)에 비해 열녀(356명)가 많이 탄생하였다.

    따라서 정절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은장도가 여자의 필수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 제도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과부보쌈(과부 업어가기)'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 당시의 금기담 중 '눈멀어 3년, 귀멀어 3년, 벙어리 3년'이라는 말은 여성에게 인내를 강요하고 있으며, '삼종지도', '칠거지악' 등 성에 관한 남성 중심의 담론은 남성에게 얽매이고 순종하는 여성상을 강요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은 정치 세력이 만들어낸 가부장적 명분에 충실한 실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는 극단적인 유교적 여성관에 대한 저항으로 천주교, 동학, 실학의 영향을 받아 자유 연애 결혼과 신정조론(여성이 순결을 잃었다고 자신이 더럽혀졌다는 생각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을 주장하는 신여성이 출현하였으나 일부 신여성의 불륜 때문에 정착화시키지 못하였다.

    라. 일제 식민지 시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의 위기를 살릴 수 있는 일꾼을 기르기 위해서, 남편을 잘 내조하고 아이들을 더 총명하게 길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900년대에 설립된 여학교의 교육 목표는 현모양처를 기르는 데 있었다. 이 현모양처의 주부상이 오늘날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만들었으며, 남녀 간에는 생리적, 심리적인 성차를 강조하여 기대되는 역할이 다르다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심어주게 되었다.

    마. 현대

    1960년대 들어 점차 산업화되면서 산업 현장에서 뛰는 남성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우월한 존재이나, 생산 활동에서 제외된 여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전적으로 한 남성(남편)의 지배를 받아야만 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부장제가 도입되었다.

    이 때는 일제 시기에 형성된 현모양처가 더욱 발전되어 '사랑받는 아내, 성공한 남편'으로 남자는 더욱 남성다워야 했고, 여자는 더욱 여성적이 되도록 노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남성은 적극적, 성취 지향적, 강인한 기질을 지닌 존재로, 여성은 수동적이고 나약하며, 부드러움과 겸손의 미덕을 지닌 존재로 사회가 규정해 놓은 문화에 길들여져서 지금도 아무런 비판없이 체념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사회적 통념이 전수되어 남성은 성적으로 강하며, 성관계에서 주도권을 쥐어야 남성답다고 여기는 마초(macho)성 남성을 조장했다. 따라서 '남성의 성욕은 본능적이고 충동적이라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라는 성기 중심적 해석으로 남성에게는 외도, 축첩, 매춘과 같은 혼외 성관계를 할 수 있는 특권이 허용되었다.

    이는 결국 오늘날 한국판 카사노바형 남성이 등장하는가 하면 성폭력을 부추기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반면에 여성은 성욕이 없는 '무성적 존재'로 오로지 자녀 출산 기능 외의 성욕 표출은 탕녀로 자신을 옭아매는 생활을 해 왔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성들이 누리고 있는 성윤리와 여성들이 지켜야 하는 성윤리가 다른 이중적인 성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한 매춘을 여성의 순결과 정절을 지켜주기 위한 '사회의 필요악'이라고 정당화시키면서 남성의 외도 문화가 양성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도 남성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며, 남성다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공과 경쟁에서 이겨 '금의환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가부장적 문화 유산인 남성 지배 문화가 위기를 맞고 있다. 남성 지배 문화는 역사적 변천 과정에서 소수 지배 권력층의 이해 관계에 따라 강화된 것일 뿐이지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표현이 아니며, 대다수의 이해 관계를 반영시킨 것도 물론 아니다. 최근 우리 나라 40대 남성들의 돌연사가 급증하여 세계 1위를 차지하게 된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한 일이 아니다.

    * 한국여성사연구회 여성분과 편. 「한국여성사」. -성과 행복 교사용 지도안. 1992. 서울: 풀빛출판사. 2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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