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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 광고와 성] 움직이는 바늘에 실을 꿸 수 있는가?
    ──•▶보도 자료실/성폭력 관련자료 뉴스 스크립 2008. 3. 16. 23:43
    [JES] 경찰청에서 집계한 성범죄 자료에 따르면 2002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강간 피해를 당한 사람이 자그만치 6.119명이었다. 강간 피해자의 수는 최근 5년간 꾸준히 6천 명을 넘겼다. 문제는 강간의 경우 수치심과 보복에 대한 공포 때문에 신고율이 낮다는 점이다.

    강간 신고율을 10%라 볼 때 실제로는 년 6만여 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1시간마다 10명에 가까운 피해자가 생긴다는 이야기다.

    분명 강간은 형법상 강력범죄로 분류되는 죄질이 나쁜 범죄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고는 커녕 오히려 쉬쉬하며 묵인되어 온 것은 강간을 바라보는 잘못된 사회적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억제할 수 없는 성욕을 가진 동물인데 여성이 그 성욕을 자극했다면 그것은 강압적 성행위가 아니라 화간(和姦)이라는 잘못된.

    그러나 굳센 믿음이 우리 사회에 진을 치고 있다. 아울러 그 저변에는 여자는 강간을 당하면서 피학적 쾌락을 얻는다는 근거없는 믿음도 함께 자리한다. 옷차림이 헤픈 여자를 보면 "저 여자는 지금 당장 내가 눕혀 주길 원해"라는 터무니 없는 해석을 내리는 남자들이 열이면 아홉이다.

    '움직이는 바늘에 실을 꿸 수 있는가?' 이는 성폭력. 특히 강간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관점을 한마디로 대변해 주는 문장이다. 강간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신분이나 유발요인 등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 매스컴에서도 성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되도록 늦은 밤에 다니지 말고 옷차림을 야하게 하지 말 것 등을 내세우며 여성들이 행동거지를 바르게 할 것을 강조해 왔다.

    남성들이 성충동을 억제해야 한다거나 강간 당한 한순간의 악몽이 여성의 인생 전체를 파멸로 몰고갈 수 있음을 이해시키는 데는 인색했다. '남자들에겐 치명적인 무기가 있으니 여성들이여 알아서 조심하라'는 것이 성폭력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 인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잘못된 인식에 반기를 드는 광고가 있다. 강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바로잡기 위한 공익광고. 비주얼은 상당히 도발적이다. 스트립 댄스를 하는 쇼걸이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가 하면 또 한 여성은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서 있다.

    망사 스타킹 차림으로 밤거리에 나선 여성은 자동차에 기대어 무언가 거래를 하고 있다. 아무리 강간을 소재로 했다지만 공익광고가 이렇게 다 벗고 나서도 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잘 들여다 보자. 이 광고를 포르노에서 성 윤리헌장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남자의 끈적거리는 시선이 모아지는 부분에 보일 듯 말 듯 작게 처리된 세 줄의 카피에 있다. "나를 강간하라고 당신을 유혹하는 것이 아닙니다(This is not an invitation to rape me)."

    '남자들이여 제발 착각에서 깨어나라!'는 것이 이 광고의 요지다. 외설적 그림에 첨가된 카피 몇 줄의 촉매가 전혀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해 내는 화학작용이 놀랍다.

    그런 관점에서 너무나 리얼한 상황을 포착한 비주얼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바로 이러한 장면이 강간을 허용한다는 의미로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왔던 그림 코드 아니던가. 신분이 쇼걸이라 해서. 노출이 심하다고 해서 그들을 마음대로 강간해도 좋고 그들의 정조를 내키는 대로 유린해도 좋다는 식의 해석은 남자만의 망상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예쁜 공익광고만을 보아왔다. '참 잘했어요'라는 칭찬과 함게 별 다섯 개를 그려 주고 싶은 예쁜 광고들. 보기엔 좋지만 그런 광고들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하게 할 수 있을까. 공익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감상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정확한 사실을 일깨워 느끼게 하고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광고는 성폭력을 바라보는 잘못된 남근 중심적 인식에 대해 명확하게 시비를 가려내면서 '움직이는 바늘에 실을 꿸 수 있는가?'란 말장난이 엄정한 진실로 통용되는 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한다. 비뚤어진 사회의 통념에 유죄를 선고하는 논리 정연한 광고 판결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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