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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양 두들 마을
    ──•▶발길 따라서/경북,대구 2010. 12. 23. 02:10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은 영양군의 동남부에 위치, 지역의 대부분이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이다.

    두들이란 마을이름은 언덕위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두들마을을 보려면 관노산을 올라야 한다.

    그곳에서 풍수적 관점에서 산 아래에 펼쳐진 국세를 본다.

     

    두들마을은 광노산(匡盧山)을 주산으로 중출맥한 용맥이 수천평의 용신명당(龍身明堂)을 만든 후 흘러내려

    마을의 터를 만들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뒷재라고 하는 이 용신명당은 물 없는 명당(明堂)이요 힘이 뭉쳐진 도두(倒頭)요 혈처(穴處)다.

    그러나 재령 이(李)씨들은 이 명혈(名穴)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특정인이 좋은 기운을 독점하지 않고 많은 후손들이 골고루 생기를 나누어 가지려는 혜안이 돋보인다.

    그래서 용신명당위엔 아무것도 짓지 않았다.

    그 주위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전망(前望)에는 두들마을 고가 수십채와 대촌(大村)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병암산(屛岩山)을 안대(案帶)로 산기슭에는 4대(四帶)가 있어

    계절을 따라 변하는 풍광을 보기 위해 찾아드는 방문객이 마음을 더욱 상쾌하게 하여준다.

     

    조선시대 이곳에는 나라에서 세운 광제원(廣濟院)이 있었다.

    광제원은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주로 의료문제를 효과적으로 풀기 위하여 둔 기관이다.

    공식적으로는 조선조 고종무렵 에 세운 것이니 글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두들에 위치한 원이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원두들 원리라 부르게 됐다.

    원리는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와 개척한 마을로 그 후로는 석계선생의 후손들인 재령이씨(載寧 李氏)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이 마을 옆 둔덕에는 석계선생의 서당인 석천서당이 남아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화매천변에 서있는 암석들에는 석계의 아들인 항재 이숭일 선생이 새겼다는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의 글씨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고

    궁중요리 서책을 쓴 정부인 안동장씨의 비석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전통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의 고향이며 그의 작품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 하리’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등 많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는 무대이기도 하다.

    생가 마당에는 200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한 문인의 출세를 상징하듯 서 있다.

    그 옆에 광산문학연구소가 있다.

    광산문학연구소는 이문열이 문학도들이 문학창작과 연구 토론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2001년 5월 문을 열었다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선생이 터를 잡아 입향했다.

    4자 항재(恒齋)이숭일(李嵩逸)이 선업을 잇고 방 후손들이 더해져 재령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크게 문풍(文風)이 일었던 곳으로 훌륭한 학자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 등이 퇴계학문을 계승 발전시켰고

    근세에는 의병대장을 지낸 내산 이현규 파리장서사건 가담자 이돈호 독립유공자 이병각 등이 있다.

     

    특히 이 마을에는 모든 여성들에게 길이 사표가 될 정부인 안동장씨의 자녀교육에 대한 전범(典範)과 부덕(婦德)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동 장씨는 석계 이시명 선생의 부인이다.

     

    장씨 유적비는 1989년 10월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영석이 짓고 장상조씨가 썼다.

    유적비의 배면에는 부인의 대표적 한시 소소음(蕭蕭吟)이 각인돼 있다.

    두들마을엔 세심대(洗心臺) 낙기대(樂飢臺) 동대(東臺) 서대(西臺)등 사대(四臺)라는 것이 있다.

    이들 대는 힘차게 뻗은 일월산 낙맥의 정기가 모인 곳이다.

    석보면 원리리 앞 두들 주남천(做南川)이 흐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으로는 화매천 수십리 무수한 산곡(山谷)이 마을을 향해 감돌고 남으로는 기암괴석 절벽은 병암산이 병풍을 두른 듯 이곳 마을은 1676년 항재(恒齋)이숭일선생이 부친 석계(石溪)이시명(李時明)선생의 삼년상을 마치고 석보로 돌아와 선현의 업을 이어 학문을 탐구 할 적에 명명한 곳으로 각대마다 암석에 각자(刻字: 글을 새기고)를 하고 명인지사들의 유상지지로(遊賞之地)로 활용하던 곳이다.

     

    특히 이들 사대 중 세심대(洗心臺)와 낙기대(樂飢臺)에 서면 전방의 촌락과 무수한 굴곡의 산야를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어 심신이 상쾌하여 배고픔을 잊고 마음을 씻을 수 있다는 뜻에서 대명(臺名)을 지었다고 한다. 주남천이 흘러 부딪치는 곳으로 동으로는 바람산을 이고 북으로는 다리골을 이루어 마을과 산의 경계를 이룬다.

     

    이 대 위에는 노송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큰 고분(일명 고려장)이 3~4기가 있어 70여년전인 1940년대만 하여도 고분 중 1기는 내부가 유백색 점토로 되어 있어 봄이 되면 이 흙을 토담집 내벽의 도장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낙기대에는 절벽의 높이가 약 10미터정도로서 동으로는 전면에 동대와 마주보며 다리골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전면에 세심대가 있어 까치골과 경계로 하여 그 길이가 약 300미터나 된다. 특히 낙기대 절벽주위에는 수백년을 넘긴 참나무 고목이 군락을 이루고 그 위 두들에는 석천서당 석계고택 유우당(惟宇堂) 주곡고택(做谷古宅) 등 문화재와 정부인 안동장씨유적비 이문열생가 석계고택과 고가가 많아 1994년 문화체육부로부터 시범 두들문화마을로 지정받은 유서 깊은 마을이다. 악기대를 전면으로 까치골을 경계로 하여 대촌을 형성하고 있다. 세심대의 주위에도 수백년이 넘는 참나무와 느티나무의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대에서 보는 전망도 화매천(花梅川) 수십곡절의 산야와 촌락의 아름다움은 마음을 씻을 수 있는 곳이라 하겠다. 두들마을 끝 절벽에 위치한 곳으로 서대(西帶)쪽으로는 시장을 형성하고 東으로는 광록정(廣麓亭)이 있고 정자 아래는 주남천과 매화천이 합류하여 흐르고 있다. 지금도 이 정자에는 벽에 선천소장도(先天消長圖)를 걸어 두고 전현(前賢)의 업(業)을 계승하며 후학을 선도하는 일에 열중하던 항재선생의 체취가 숨 쉬는 듯 시인 묵객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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