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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론성지 탐방기 (2011. 5.14)
    ──•▶발길 따라서/강원도 2011. 5. 15. 19:02

     원주 치악산 드림랜드 유스호스텔로 가는길...

    왜 가냐구여??

    원주 다문화 지원센터 요청으로

    다문화 가정 행복 프로그램...다문화와 양성평등 강의 하러 가는 길이었지라..

     

    카메라부터 챙기는 상아아짐...

    여유 시간을 그냥 넘길수야 없지..

     

    원주에 있는 샘이랑 만나...함께 배론성지로 고고씽...

     

     

     

    조선 순조 1년(1801)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 때부터 지금까지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 천주교의 성지이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라해서 붙여진 것이다.

    유적으로는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이 머무르며 ‘백서’를 썼던 토굴과 성 요셉 신학교,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이 토굴에서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교에게 보낼 글을 썼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주소 :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623번지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

     

     

     

     

     

    황사영 백서...

     

    가로 62㎝, 세로 39㎝ 의 흰 세명주(細明紬)에

    가는 붓으로 122줄, 13,384 글자를 한문으로 쓴 편지로서

    ‘백서(帛書)’로 불리게 된 이 글은

    중국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신유박해 진행 과정과 순교자 열전,

    교회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위한 5가지 방안 등인데,

    그 중 조선감호책 (‘종주국’ 청황제가 조선을 보호 감독하기위해

    조선 왕을 부마로 삼을 것)과 대박청래책

    (大舶請來策 - 선박과 군사를 조선에 보내 국왕을 협박하여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 문제 되었다.


    결국 황사영은 ‘흉서에 말한 것은 글자마다 흉측하고 구절마다 역심(逆心)이어서

    위를 범하는 기막힌 말뿐이었고, 나라를 원수로 삼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대역부도죄로 결안한다.” 는 선고를 받고 11월 5일 능지처참(陵遲處斬) 되었다.

    조선 엘리트 선비의 좁은 안목을 드러낸 것이고,

    한국 가톨릭에도 씻기 어려운 오명을 입힌 글이었다.


    황사영은 “국가에 해를 끼침으로서 조선순교자 선정이 보류” 되었고

    <다블뤼 주교 비망기 제4권>, 2백년이 지난 뒤

    한국 주교회의가 ‘하느님의 종’을 선정할 때도

    ‘순교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국가에 해를 끼칠 행위를 했기 때문에’ 제외됐다.


    1894년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조정에서는 묵은 문서들을 파기했다.

    이 때 개화관료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이건영(요셉)이 백서를 입수하여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달했다.

    1925년 조선 순교 복자 79명에 대한 시복식이 로마에서 열렸다.

    행사에 참석한 뮈텔 주교는 이 백서를 로마 교황청에 접수시켰다.

    그 뒤 이 백서의 존재는 잊혀졌다.


    1970년대 중반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는 이 백서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의 문서고에 있음을 확인하고 한국교회에 알렸다.

    2001년 신유박해 200주년을 기념해 백서는 한국으로 돌아와

    합정동 절두산순교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馬丁>


     

     

     

    배론 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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