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제주 4.3사건 기념관 (제주 여행기 2011. 5.20)
    ──•▶발길 따라서/제주도 2011. 5. 22. 20:12

     

     

     

     

    제주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국적인 사건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 당국의 정책의 실패와 사회 문제 등으로 민심이 불안한 상황에서

    1947년 3월1일 경찰의발포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주4.3기념관은 이념에 희생된 억울한 영혼들의 안식처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당국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시대때 경찰출신들이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같은 극우 반공단체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났다.

    1947년 3월 1일에 경찰은 3.1절 기념식에서 다소 격해진 시위에 폭도로 오해하여 제주도민에게 총을 쏘았다.

    미군정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 민심수습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군정경찰은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오히려 제주도민을 '폭도'로 몰았다.

    제주도민들은 이에 항의하여 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대해 미군정 당국이 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추가로 파견함으로써

    제주도민들과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더욱 커져 갔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은 김달삼 등 500여 명이 무장을 하고

     한라산 정상과 주요 고지에 일제히 봉화를 올리고 인공기를 앞세우고 ‘적기가’와 ‘인민항쟁가’를 부르면서

    경찰지소 12개소를 비롯한 수많은 관공서 건물을 불태우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관과 우익인 서북청년단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회원 등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가 되었다.

     

    미군정은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5월 5일에는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미군정은 즉각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경찰, 서북청년단등 반공단체를 증파하였다.

    여기에 맞서는 제주도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인민 유격대를 조직하고 대항하였다.

    무장대는 경찰서북청년단등 극우 반공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반감과 저항,

    남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무장 항쟁의 기치로 내세웠다.

     [4]5·10 총선 북제주군 2개 선거구 결과는 무효처리되고 1년뒤인 1949년 5월 10일에 재선거가 치루어졌다

     

    1948년 5월 15일 1단계 진압작전이 마무리되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좌익들의 재공세로 폭동을 완전히 진압하는데(1952년 11월말) 만 4년이 걸렸다.

     

    제주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희생자의 수를 정확히 알기 어려워 만 5천~2만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심지어 '8만 명 희생설'까지 나오고 있다.

    3만 명은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

    그 실례로 제주 4·3학살피해자의 증언 중에는 극우청년들에게 어린이에 불과한 아들을 잃었다는 증언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또한, 재일 한국인들 출신구성을 보면 제주도출신자가 상당히 많은데, 이는 제주 4·3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등의 반공 극우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지역(주로 오사카지역)을 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4.3사건 주동자인 김달삼은 사건이 진행 중이던 1948년 8월25일 월북,

    김일성에게 4.3사건의 전과를 보고하고 국기훈장2급을 수여받았으며,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남침했다

     50년 3월 정선지역전투에서 사살됐다.

    김달삼은 사후 ‘남조선혁명가’의 비문을 받고 평양근교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는데,

    이러한 사실은 2000년 3월 평양을 방문했던 우근민 제주지사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