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Today
Yesterday
Total
  • 영양 오일도 생가를 찾아
    ──•▶발길 따라서/경북,대구 2011. 11. 27. 07:41

    영양 교육지원청 강의 가는 길

    목적지 도착하고도  50분의 여유...

     영양강의때마다 오고가는 길에 눈에 들어온 오일도 생가팻말이

    잠시 머물고 가라 손짓을 한다.

    초청을 하는데 그냥 지나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ㅎㅎ

     

     

     

     

    오일도 생가는

    일제시대 애국지사이자 항일 시인인 일도 오희병(1901∼1946) 선생이 태어난 집으로 그의 할아버지 시동이 고종 1년(1864)에 세웠다고 한다

    정침은 전체 ㅁ자형으로 사랑채 앞면과 오른쪽에 마루가 돌출되어 있고,

    대문간을 중심으로 왼쪽에 글방이 있고 오른쪽에는 사랑채가 놓여 있다.

    대문채는 대문간을 중심으로 외양간과 마구간, 오른쪽에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어디에 있나요?

    경북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780

     

     

    차 소리에 동네 오르신이 고개를 내밀며

    어디서 왔어요 한다

    오일도 생가를 찾는다고 하니...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이다며 오일도 생각를 일러주신다.

     

     

     

    오일도 생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건축 이야기

    항일시인인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 1901~1946) 생가는 그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1864년(고종 1)에 건립하였다. 오일도는 1925년 문예월간지인『조선문단』에 처녀작인 ‘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여 민족을 한을 달랜 시인이다.
    오일도 생가는 정면 5칸 반,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주위에는 기와를 얹은 토석담장을 둘렀고, 전면에는 5칸 규모의 웅장한 솟을대문을 세워 드나들게 하였다. 평면은 중문칸(中門間)을 사이에 두고 좌측에 1칸 규모의 글방과 반 칸 규모의 뒤주를 연이어 붙여 놓았고, 우측에 사랑채를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지붕을 팔작으로 구성하여 사랑채로서의 격을 높였다. 또한,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방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는데, 우측 사랑방 뒤쪽에 있는 온돌방이 오일도가 거처하던 방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뜰을 사이에 두고 2칸 규모의 안대청이 자리하고 있다. 대청의 좌우에는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으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건너방의 전면에는 통래칸(通來間)과 고방(庫房)을 연접시켜 각각 좌,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건축 특징
    오일도 생가는 경북 북부지역 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ㅁ자형 팔작기와집이다. 이 건물은 건축뿐만이 아니라 항일시인이 기거했던 역사적 공간이라는 점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건축 구성
    오일도 생가는 정면 5칸 반,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팔작기와집이다. 주위에 토석담장을 두르고, 전면에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세웠다. 평면은 중문칸(中門間)을 사이에 두고 좌측에 1칸 규모의 글방과 반 칸 규모의 뒤주가 있고, 우측에 사랑채를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팔작기와집으로, 고택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는 사랑마루방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오일도가 거처한 곳은 우측 사랑방 뒤쪽에 있는 온돌방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뜰을 사이에 두고 2칸 규모의 안대청이 자리하고 있다. 대청의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다.

     

    문중 이야기
    - 문중이야기
    정축보 서(丁丑譜 序, 1817년, 순조 17)에 의하면, 오씨의 근원은 해주에서 나왔다. 나누어져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진 사람은 고려의 삼사좌윤 오사룡(吳士龍)으로 그가 귤배공(橘杯公)의 비조가 된다. 을축보(1985년)에 의하면, 낙안 오씨는 16개파로 구성되어 있다. 파별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영양에는 국헌(菊軒) 수눌파(受訥派)가 분포하고 있다.

    국헌 오수눌(1565~1648)은 오시준(吳時俊, 1527~1613)의 둘째 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학봉 김성일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여 많은 공적을 세웠다. 영해부사의 창의에 가담하여 영덕으로 도주하는 왜병 수십 명을 참수하였고, 당시 행재소에 머문 선조(宣祖)에게 남쪽의 전황을 알리기 위해 수개월의 위험을 무릅쓰고 의주로 떠나는 등 전란에 몸을 아끼지 않는 충성을 발휘하였다.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에 등록되었으며, 문집『국헌실기』가 있다.
    - 관련유적
    - 연소정(蓮沼亭) : 영양읍 감천1리 394-1번지
    칠원현감을 지낸 오시준이 관직을 마치고 돌아와 소요하던 정자이다. 영양읍으로 들어가는 31번 국도 우측 반변천가에 주위의 아름다운 풍광과 조화를 이루며 서있다. 현재의 건물은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다.

    - 오일도 생가 : 영양읍 감천1리
    애국지사이자 항일 시인인 일도 오희병의 생가이다. 그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1864년(고종 1)에 건립하였고,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8호에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 화수재(花樹齋) : 영양읍 감천1리 835번지
    낙안오씨 감천 입향시조인 오원로(吳元老)를 기리기 위해 1687년에 건립한 재실이다. 오일도 생가 뒤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약 5백여 년 동안 화수촌을 이루고 있다.

    - 송산재(松山齋) : 영양읍 감천1리 768번지
    낙안오씨 문중 재실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아담한 팔작기와집이다.

     

    관련인물
    - 오희병(吳熙秉, 1901~1946)
    영양읍 감천동에서 천석 거부였던 아버지 오익휴(吳益休)와 어머니 의흥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호는 일도(一島), 서예가 오희태의 동생이다. 성격이 호탕하고 낭만적이었다. 14세까지 고을의 사숙(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한 뒤 1918년 영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겨하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 않았다. 1922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리쿄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하였다. 귀국 후 1년 동안 근화학교[덕성여중 전신]에서 무보수 교수로 근무하던 중에 맏형 오희태로부터 사재를 얻어 1935년 2월에 시 전문잡지인『시원(詩苑)』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1935년 12월 5호를 내고 발행이 중단되었다.
    오일도는 이헌구, 김광섭 등과 가까이 지냈고,『을해명시선(乙亥名詩選)』(1936년)과 시인 조지훈의 형 조동진(趙東振)의 유고시집『세림시집』(1938년)을 출판하였다.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자 1942년에 낙향하여 「과정기(瓜亭記」 등 수필을 집필하면서 칩거하였다. 광복 직후 바로 상경하여 문학 활동을 재개하면서『시원』의 복간을 위해 진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모사고 그 이듬해 2월에 타계했다.
    - 오희태(吳熙台, 1888~1966)
    자는 훈경(勳卿)이고, 호는 서주(西州)로 서예가이다. 오수눌의 9세손이며, 오익휴의 맏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났다. 항일시인 오희병의 맏형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개화기 교육에 힘쓴 선구자이다. 오희태는 고향에서 사립 감호서숙(鑑湖書塾)을 세워 지방 청년교육에 크게 공헌하였고, 일제강점기에 도평의원과 연초 조합장 등을 역임하여 지역 발전과 농민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겨 만년에 오세창(吳世昌)과 더불어 서예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영양 > 영양청기권 > 영양읍 감천리
    - 영양읍 감천리는 뒷산이 청기리와 연접해 있고, 31번 국도에서 맞은 편 산기슭에 자리한다. 큰 시냇물이 마을 앞을 흐르기 때문에 감들내 혹은 감내,감천(甘川)이라고도 부른다. 본래 영양읍 읍내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남면의 지평동과 하풍동을 합쳐 감천동이라 하였다.
    마을은 오일도 시인의 시비(詩碑)와 범바위 위에 있는 폭포, 근처의 절벽과 측백나무 숲이 어우러진 곳이다. 오일도 시비는 국도 앞 동산에 마련되어 있어 왕래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폭포는 마을의 서편 산 위, 백여 척 되는 범바위 안에 있다. 또한, 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바위 절벽 주위에는 측백나무가 무리지어 숲을 형성하고 있다. 이 측백나무 숲은 약 300평 가량되는 절벽의 바위틈에 신기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절벽 아래에는 깊은 소[강]이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5개의 자연 마을이 감천리 한 동으로 묶여 있다.

    가짓들,지평골,지평(芝坪)은 토질이 비옥하고 살기 좋아 가짓들이라 불린다. 한양 조씨 문중의 조규(趙?)가 입암면 연당리 임천에서 이곳으로 집을 옮겨와 가짓들을 사서 집과 묘우를 세워 삼수당(三秀堂)이라고 하였다. 조규가 삼수당을 지은 뒤부터 마을 이름을 지평이라 불렀다고 한다.

    감내,감들내,동곡(桐谷),지곡(地谷)은 큰 시내가 마을 앞을 감돌아 흐르는 모양에서 이름을 땄다. 처음에는 지곡이라 불렀는데 4백년 전 오시준(吳時俊, 1527~1613)이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동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뒤 산기슭에 맛이 단 물이 솟는다고 하여 감천(甘泉)이라고 부르다가 감천(甘川)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괴박골,괘벽(掛壁)은 바위가 벽에 걸려 있다는 뜻이다. 감천 1리의 뒤쪽 골짜기로, 현재 대여섯 가구가 흩어져서 살고 있다. 이곳에 깨밭이 많아서 ‘깨’가 ‘개’나 ‘괘’로 비슷하게 발음한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설도 전해온다.

    진마골(陳馬谷),진막곡(鎭幕谷),김막곡(金幕谷)은 마을 입구 오른쪽 능선에 있는 산성에서 마을명이 유래한다.

    하풍(河豊),합풍(合風)은 가짓들 아래쪽에 있고, 입암면과 경계를 이룬다. 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며, 바람도 이곳에 머물렀다 가는 좋은 산세를 지녀 합풍이라도 한다. 높은 산기슭에 자리하면서 샘이 풍부하여 하풍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인은 마실을 갔는지

    고택마루에 햇살만 가득 놀고 있다.

     

     

     

     

     

     

     

     

    겨울 난방을 위해 패어 놓은 장작들...

    장작불 지핀 방에 누운 듯 등이 따뜻해 지는것 같다.

    겨울나기 완료~~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