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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장난 시계
    ──•▶문학의 향기/수필 속으로 2006. 3. 20. 00:07


    주말 아침이었다.

    지난밤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불쑥! 아이들 데리고 함께 나가자며

    수저를 놓기가 바쁘게 남편은 외출을 서둘렀다.

    어리둥절 해하며 어디를 가는지, 왜 가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이는 남편을 지켜보며 말해 줄 때까지 참기로 했다.

    아이들과 난,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남편은 아파트 주차장으로 차를 점검하러 나갔다.

    엔진오일, 타이어 등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장거리 운전을 뜻한다.



    차가 출발하고 10여 분이 지나 남후농협 근처에 다다르자,

    행색이 남루하다 못해 가까이 다가오면, 멈칫 물러서야 할 것 같은 남자가 힘없이 손을 들었다. 차는 비상등을 켜고 느린 속도로 그 남자 앞에서 멈추어 섰다.

    남편과 남자는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어색하게 눈길만 주고받았다.

    남편은 남자를 태우고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깨끗하게 세차를 한 차와 늙수그레한 남자의 모습은 흑백처럼 대조적이었다.

    황달기가 있을 듯 누렇게 뜬 눈동자, 찬바람 맞은 가마니처럼 메말라 거친 입술,

    헌 수세미같이 헝클어져 가시를 세운 머리, 손등과 손톱 밑에는 덕지덕지 때가 눌어

    씻어도, 돌멩이로 밀어도 깨끗해질까 싶을 만큼 남자는 거지 행색이었다.



    점퍼는 너들 너들 걸레처럼 해졌고,

    바짓가랑이엔 몇 겹을 겹쳐 입었는지 색다른 바지 단이 삐죽 빠져나와 있었고,

    신발도 해져 발가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비누란 걸 단 한번도 써 본 적이 없는 듯 몸냄새는 대단했다.

    누룩 뜬 냄새 같기도 하고, 담배에 절고 땀에 절은 눅눅한 골방 냄새 같기도 하고,

    오뉴월 장마철 시궁창 냄새 같기도 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냄새였다.  

      

    차안은 이미 비릿한 냄새로 가득찼다.

    차창을 열고 싶었지만 동승한 남자가 혹여 마음이라도 다칠까하여 참기로 했다.

    되도록 입으로만 숨을 들이쉬는데도 냄새 때문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는데,

    남편은 예상했던 것인 양 별로 개의치 않았고,

    네 살 난 딸아이는 나들이라 생각했는지 싱글벙글 웃음을 내려놓지 않았다.



    두어 시간을 달려서 차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멈추어 섰다.

    작고 허름한 가게 앞에서 녹물이 번진, 다방 간판을 가리켰다.

    다방에서 기다리라는 눈짓을 하더니, 남편은 아이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를 데리고 차에서 내리자, 뒤늦게 생각이 들었는지 차 안에 있던 남자가 따라 내리더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연방 머리를 조아렸다.

    옆에서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꾸벅 절하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다 해진 주머니 속에서 한 움큼 휴지 뭉치를 꺼내 내 손에 쥐여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자 미안한 기색을 지어 보였다.

    남자가 차에 오르자, 남편은 남자와 함께 차를 몰아 어디론가 멀어져 갔다.



    다방으로 들어선 아이와 나는 남편 눈에 띄기 쉬운 문 맞은편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른 시간이라 다방 안은 손님이 없어 썰렁썰렁 했다.

    칸막이 겸 어항이 있었는데,

    어항 안에 들어있는 물고기의 퀭한 눈과,

    그 남자의 눈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미치자,

    문득 그 남자가 쥐여준 휴지 뭉치가 생각났다.

    손에 땀이 났는지 휴지 뭉치는 젖어 있었다.

    그 남자가 어색하게 쥐어준 뭉치를 풀었더니

    둔탁하게 생긴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고장 난 시계, 흔들어도 시계는 움직이지 않았다.

    낡고 고장이 나 보잘것없는 시계였지만 남자에게는 소중한 물건이었다는 것을,

    그 남자의 행색으로 보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남자가, 왜 시계를 주고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시간이 훨씬 지나 남편은 딸아이와 내가 기다리는 다방으로 들어왔다.

    목이 마른지 냉수를 들이켜고 나서는 남편은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남자는 남편이 근무하는 직장 부근을 떠도는 사람이었다.

    가족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친척들이 몇 있지만, 그 남자를 받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떠돌이처럼 떠도는 남자를, 남편은 먹고 잘 수 있고,

    소일거리도 있어 어느 정도의 보수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준 것이었다.

    이야기 도중에 남편에게 휴지 뭉치였던 시계를 내밀었다.

    남편 말에 의하면, 그 시계는 남자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고 한다.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연유로 시계를 주고 갔는지 알 수 없다며,

    다음 면회 시에 돌려주겠다며, 버리지 말고 보관하고 있으라며 당부를 했다.



    그런데 결국 시계는 남자에게 돌려주지 못했다.

    그곳에서, 남자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남후 부근을 떠돌았고,

    어느 날 새벽, 남자는 술에 취해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죽고 말았다.

    떠돌이별처럼 떠도는 삶, 그들의 사연 속에는,

    우리가 통속적으로 생각하는 부귀를 누리던 사람부터 밑바닥 인생까지 있다고 한다.

    그 어떤 이유가 세상 속 사람들과 동화하지 못하고,

    사람들 밖으로 배회하면서 사는 것인지,

    평범하게도 한 가정주부에 불과한 나는 짐작할 수조차 없다.

    세상의 경계처럼 가로지른 현관 문턱을 들어서면 마음을 놓다가도,

    문득 벽에 걸어둔, 그 남자가 남기고 간 고장난 손목시계를 본다.



    그 남자가 그토록 그리워했을 시계 속에 담긴,

    소중한 사람이라 말한, 그 어떤 사연과 함께 영원히 멈추어 버린 시계.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더니, 그 남자도 무언가 남기고 싶어서였을까.

    벌써 죽음을 예측하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그 어떤 사랑의 실체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 주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 일을 내게 부탁하고 말없이 가버린 것은 아닐까.

    무소유(無所有)라고 말하는 그것도 한 삶이겠지만, 세속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그와는 조금 다르게 살아야 하기에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가르쳐야 하고,

    늙은 부모를 모셔야 하는 등, 조금씩 흔적을 남기며 살다가 죽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진정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을 것 같던 그 남자도,

    비록 고장 난 시계였을망정 남모를 사연 한 토막을 남기고 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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