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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와 딸
    ──•▶문학의 향기/수필 속으로 2006. 3. 3. 00:22

      엄마와 딸

     


    머뭇거리다 문을 열었다. 곰팡내 나는 골방에서 흐느끼고 있는 나를 보았다. 입이 바싹 말라 엄마를 애타게 불러도 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퀴퀴한 방에 갇혀 겁에 질린 나와 일그러진 엄마의 얼굴이 눈에 들어서는 순간, 꿈과 현실 사이에서 질주하는 기차소리가 이명현상으로 다가선다. 순간 천길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 아뜩하다.

    악몽이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방금 전의 일처럼 섬뜩하니 칼날같이 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듯 했다. 식은땀으로 온 몸이 흠뻑 젖었다. 거칠게 몰아쉰 숨이 생선가시가 목젖에 걸린 듯 했다.

    개꿈 일게다. 일순간 지워버려야지 하는 생각이 소용돌이처럼 휘돌며 새어나왔다. 며칠 잠을 자지 못해 피곤 때문 일 것이다 하며 애써 마음을 바꾸어 보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불길한 생각이 꼿꼿하게 고개를 내민다. 혹시 밀양에 계신 엄마에게 무슨 일 이라도 생긴 것일까? 이런 저런 상념이 따라다녀 일하는 도중 번번이 헛손질이었다.


    거뭇거뭇 하루가 저물 녘 전화벨이 지칠 줄 모르게 울렸지만 이상한 조바심에 사뭇 긴장되어 수화기를 들지 못했다. 다시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물 젖은 솜같이 축 늘어진 엄마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경아 내다. 엄마다”

    “여그 병원 이데이 ”

    놀란 마음이 목 언저리에 돌덩이 하나 달린 듯 뻣뻣해지며 허둥대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목소리라도 들려오니 다행이다 싶었는데, 정작 밀양으로 내려가 엄마를 보았을 때는 그게 아니었다.

    출근길, 터미널 근처에서 차와 접촉사고가 난 어머니는 발목이 접쳐 일어나기조차 힘들만큼 다리는 중심을 잡지 못했고, 사고의 충격으로 정신은 혼미한 상태여서 사고를 낸 버스를 기억하지 못했다. 길가에 내 팽개쳐 119 구급대가 오기 전까지 칼날 같은 비명소리를 내지르고 있었을 엄마를 생각하니 눈앞이 흐려졌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엄마의 얼굴에는 멍 자국이 선명했고 걷는 것은 무리라고 간호사가 전해 주었다. 엄마는 잠들어 있었다. 많이 지쳐 보였다.

    숨고르기가 힘든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깊게 패인 목에 앙상한 뼈가 드러난 능선과 밭고랑을 닮은 주름살이 겹쳐 쪼글쪼글한 엄마를 가깝게 보면서도, 얼른 다가서지 못했다.

    세월을 이길 수 없었음일까. 그 흔적들이, 저토록 깊게 패인 주름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엄마는 6개월을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병원에서의 치료가 어머니를 힘들게 했지만 한번도 내색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고생하지 않고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사셨다. 진 다홍빛 해당화의 고운 자태로 고상한 삶을 누렸던 나의 엄마는 아버지가 일어나시기 전에 홍매(紅梅)의 향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운 가루분 냄새로 치장을 하셨고 그 향기는 그윽했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에게서 스며나는 분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성의 밑바닥에서 젖어 나오는 비릿한 냄새를 희석시키는 것이라 단정 지었고 모성은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희생의 삶을 사는 것이 어머니의 표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분 냄새는,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엄마는 고등 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이셨다. 지적(知的)이고 냉철(冷徹)했다. 학기 초에 부모의 학력을 기재할 때 친구들은 고등 교육을 받은 엄마를 부러워했고 우아하고 고운 엄마를 흠모했지만, 난 그런 엄마를 원하지 않았다.

    가끔이라도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받쳐 들고 자식을 기다리는 엄마를 원했다. 소풍날이면 김밥을 정성스럽게 말아주시는, 친구의 엄마가 내 엄마였으면 했다. 졸업식 날 아버지와 언니와 짝은 사진보다 어머니와 찍은 사진이 간절했다.


    기관지가 나빠 감기를 자주 앓던 내가 고열로 사경을 헤매 일 때, 밤새 머리에 찬 수건을 올려 주시며 앙상하게 여윈 가슴에 나를 품어 주셨던 분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5남매에게 엄마의 몫을 다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해가 지날 때까지 어머니에 대한 섭섭함은 오래 남았다. 엄마에 대한 애틋한 기억도 없었고, 그리움은 더더욱 없었다.


    대학 4학년 여름 맹장이 복막염이 되어 수술을 받았을 때, 엄마는 수술을 한 딸을 혼자 내버려 둔 채 일을 나가셨다. 지쳐 병실을 들어서는 엄마가 안쓰러웠지만 마음과 다르게 아픈 자식을 팽개쳐 두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 것이냐며 독설을 퍼부었다. 나에게 어떠한 부모의 권리도 주장하지 말라고,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가겠다고 엄마를 향해 독살스럽게 차고 모진 말들을 뇌까리듯 내 뱉아 엄마의 가슴을 찢어 댔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불현듯 지난 악몽 속에서, 주름이 패여 버린 엄마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찾아 온 아버지의 죽음과 겹쳐지며 상처를 후비듯 아리기만 했다. 아버지의 부재를 어느 한순간이라도 상상이나 했던가? 아버지가 없는 자리는 아버지 한 분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모성과 부성의 부재라는 큰 산이 무너진 것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나의 슬픔만 생각했었다. 나만 힘든 줄 알았다. 엄마의 슬픔과 아픔은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가 남편의 죽음 앞에서 몸부림치며 흐느껴 우는 아내의 눈물은 남편의 죽음, 그 자체의 애석함보다 먼저 “앞으로 어떻게 살란 말인가”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 흘리는 눈물이 더 많다고 하던가. 나의 어머니도 그러리라 생각했었다.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너무도 평안하게 인생을 살았던 엄마 역시, 자신이 누리고 산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 당신이 사랑한 목숨 같은 사람을 잃은 슬픔임을, 나는 알지 못했다.


    퇴원하고 며칠 후 걸레질하시는 엄마의 시린 등 아래로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다. 얼굴이 비쳐날 듯 반들반들해진 마루 위에 뜨거운 눈물이 방울방울 미끄러져 돌았다. 순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엄마의 유난히도 길었을 겨울이 영화필름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어깨를 감싸주고 싶었지만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 슬픔은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분노의 감정들이 모래가 물에 스미듯 엄마의 눈물 속에 점차 사그러 들었다. 어찌 내 어머니의 눈물이 자신의 처지를 먼저 생각했으랴. 어머니의 눈물은 자신의 처지보다 자식들이 겪고 갈 힘든 상황을 생각해 흘린 눈물임을,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지난해 우수가 지날 무렵 며칠을 심하게 아팠다. 뺑소니차에 치여 입원중인 남편을 간호하느라 대구 서울을 오고가며 몸과 마음이 파김치가 되어 몸살을 불러왔다.

    몸살이었지만 먹는 것마다 토했다. 딸아이에게 아침거리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학교를 보냈는데 초등학교 2학년이던 아이가 현관을 들어서며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아이의 고사리 손에는 호박죽이 들려 있었다. 언젠가 저희들이랑 마트에서 사온 호박죽을 즐겨먹던 엄마가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먹지 못하고 토하기만 하는 엄마에게 제 것 사먹기도 아까워서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넣어둔 돈으로 비닐 포장에 담긴 호박죽을 사들고 온 것이다. 호박죽 한술을 떠먹는데 목에서 울컥 울음이 치받쳐 목이 메더니 불현듯 엄마가 떠올랐다.

    호박죽을 맛나게 드시던 엄마의 기억에 미치자 죄스러움이 복받쳤다.

    그러고 보면 난 딸아이처럼 한번도 엄마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했다. 딸처럼 학교에서 배웠다고 노래를 불러준 적도 없었고, 간혹 기분 좋은 일이 있어도 엄마 볼에 입을 맞추며 “엄마 사랑해"라며 응석 부리는 것은 생각도 못했으며, 혼이라도 난 날이면 며칠이 지나도 엄마의 눈과 마주치지 않았다.


    매몰찬 딸이었고 인정 없이 매정한 딸이 나였다.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 아니라 고맙다는 말조차 한 기억이 없었다. 나의 딸은 살갑기만 한데 나는, 어머니가 다루기 힘든 자식 이었을 것이다. 그런 딸이 밉기도 하였으련만 내 나이 불혹이 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비친 적이 없었으며, 미움하나 남겨두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포근히 감싸주던 어머니. 그 이름만으로 힘이 되고 버팀목이 되었던 나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자식을 낳아 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하던가. 이 평범한 말씀이 이제야 겨우 알 것 같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구슬프게 읊조리는 어머니.

    유행가 가락에 실려 세월저편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를 향한 애잔한 그리움은 나이만큼 자라 그 큰 나무 그늘아래 포근히 나를 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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