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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과 현실 11호 - 손 큰 할머니와 아래층 할머니
    ──•▶문학의 향기/수필 속으로 2010. 1. 21. 09:31

     

     

     

    손 큰 할머니와 아래층 할머니

     

    진 애 경 (陳 愛 卿)

     

    아파트 마당은 고즈넉했다. 마당 한 귀퉁이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나무 벤치에 걸터앉았다. 나무마다 잎들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손으로 툭 쳤더니 나뭇잎들이 우수수 날렸다. 머리와 어깨에 떨어진 낙엽 몇 장을 책갈피 사이에 끼우고 있으려니, 잠이 덜 깬 얼굴로 앞 동 새댁이 허청허청 발걸음을 옮기며 연방 하품을 해대다 손을 흔들었다.

     

    자고 또 자도 잠이 온다는 새댁이다. 게으르게 보여서 싫은 구석도 있지만 참하고 싹싹해서 밉지 않은 새댁이었다. 긴 주름치마에 머리를 질끈 동여맨 새댁은 아침부터 은근슬쩍 남편 자랑을 늘여놓는다. 그러다 시댁 식구들 이야기가 나오면 시집살이했을 때의 서운함과 야속함을 감추지 못했다. 새댁은 눈물도 많아서 한 고향 사람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고향에 혼자 계신 친정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새댁의 설익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손 큰 할머니가 멍석을 펴고 무말랭이를 널고 계셨다.

     

    손 큰 할머니는 새댁 앞집에 사시는데 가을볕에 텃밭에서 손수 길러 낸 무, 토란, 호박들을 말려 동네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 특색 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만들어 이웃들을 불렀다. 인심이 후해서 동네 아낙들이 붙인 이름이 “손 큰 할머니”이다. 손 큰 할머니는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달강달강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아낙들은 그런 할머니가 아이들의 메마른 정서를 따뜻하게 키워준다며 고마워했다. 손 큰 할머니의 바쁜 손놀림을 지켜보고 있으니 눈에 익은 얼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유치원 아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아낙들이다. 노란색 유치원 버스가 도착하니 참새처럼 지저귀던 아이들을 태우고 버스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유치원 버스가 길 끝에서 멀어지자 그제야 삼삼오오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아파트 마당은 소소한 이야기보따리를 푸느라 여기저기서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투박한 질그릇 같은 목소리, 아주 친근하고 쾌활한 목소리가 살갑게 아파트 마당으로 흩어졌다.

    아낙들이 사라진 아파트 벤치는 한산했다. 비둘기가 내려앉아 비척비척 걸어 다녔고, 할머니 한 분이 벤치를 지키고 있었는데 우리 집 아래층에 사시는 할머니였다. 150센티쯤 되는 작은 키에 팔순이 다되어 가는 듯했지만 기운이 펄펄했고 눈빛은 차가웠다. 또 고집이 세고 신경질적이었으며 불만이 많았다. 아래층 할머니는 주변이나 이웃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손 큰 할머니만은 아래층 할머니의 그런 마음을 잘 이해해 가끔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아래층 할머니는 이웃들의 이야기에 말끝마다 핀잔을 주었고, 가끔 아이들의 모래 장난이 마음이 안 드는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그럴 때마다 손 큰 할머니는 불쌍한 할마시, 할마시하며 안타까워하셨다.

     

    아래층 할머니의 모습은 거무스름하고 거친 손에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더울 때나, 추울 때나 오래되어서 늘어난 하얀색 남자 러닝셔츠 차림이었고, 할머니는 학교에 간 손자들을 벤치에서 기다리는 것이 하루일과의 전부처럼 보였다.

     

    언제는 아낙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에, 억세기 이를 데 없는 눈초리로 할머니는 큰 소리를 내며 아낙들을 나무랐다. 그럴 때는 아낙들이 슬금슬금 흐트러졌다가 할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다시 벤치로 모여들었다. 연세에 비해 정정하시어 오래 살 것이라는 말을 했었는데, 어느 날인가 벤치에서 죽어가는 비둘기를 안은 할머니의 허무한 눈빛을 보고 흠칫 놀랐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심지어 손자들에게도 몰인정하게 보이던 할머니였기 때문에 그날의 눈빛은 잊히지 않았다. 할머니의 눈빛 속에 배어 있던 외로움과 쓸쓸함. 어쩌면, 힘없이 사그라지는 비둘기의 눈빛을 보고 자신의 생을 이미 짐작 했을지도....

    짙은 머루 빛 하늘이 바람에 흔들려 비가 올 것 같은 날이었다. 점심때가 지나갈 무렵 허기에 진 초췌한 모습의 아래층 할머니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할머니의 동공에 설핏 검은 그림자가 보여서, 순간 놀랐다. 타고 남은 재처럼 폭삭! 꺼져 내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아파트 어디에서도 아래층 할머니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손 큰 할머니를 통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만 들릴 뿐이었다.

     

    지난해 겨울이 갈 무렵 황혼녘, 아파트 계단을 오르다 404호 현관 앞에 쌓아놓은 음료박스를 보고 아래층 할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손자둘이 초등학생이 되고서야 할머니는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택할 수 있었던 손자에 대한 내리사랑을 내려놓으며 생도 마감을 했다. 병원에서 장례를 치렀는지 구슬픈 곡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볼품없는 박스가 아니었더라면 이웃에서는 할머니의 죽음을 아무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할머니의 존재는 묻혔을 것이다. 놀이터에 놀고 있는 손자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습관처럼 벤치가 있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고사에 새는 죽음에 이르러 그 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선하다고 했다. 아래층 할머니의 고향이 어디인지, 남편은 어떠했는지, 젊은 시절은 어떻게 살았는지도 듣지 못했다. 그저 이웃과 더불어 살지 못했던 할머니의 기억으로만 남아 이웃들 간의 오고가는 이야기로 마당을 떠돌고 있다.

    날씨가 추워졌다. 새댁은 잠이 더 늘었다. 손 큰 할머니는 여전히 이웃들에게 인심을 내느라 분주하다. 아낙들의 모습도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이젠 새들의 흔적도 뜸하고 벤치에는 할머니가 부리던, 그 기세 사나운 울부짖음 대신 낡은 나무 벤치만 할머니의 흔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常 娥(상아) 진 애 경

    약력

    ♠ 수필가 2007년『수필시대』등단

    ♠ 한국 문인 협회 회원 (2008)

    ♠ 여성부 노동부 위촉 성희롱 예방 전문 강사.

    ♠ 여성부 노동부 위촉 양성 평등 전문 강사.

    ♠ 법무부, 보건 복지 가족부, 여성부 국제결혼 사전 교육 전문 강사

    ♠ 여성부 위촉 국제결혼 가정 전문 강사

    ♠ 여성부 아동 성폭력 예방 전문 강사

    ♠ (재)청소년 폭력 예방 재단 강사.

    ♠ 노년 문화 연구소 노인 지도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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