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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의 의자
    ──•▶문학의 향기/수필 속으로 2006. 6. 3. 09:35

    아버지의 의자

                                                                        

      가을이구나.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과 한껏 높은 하늘만 보아도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제 몸 사려 계절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키 작은 단풍나무가 꽃 빛을 닮아간다. 만산홍엽도 멀지 않았다. 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창가에는 들길에서 꺾어 온 가을꽃들이 화병에 얌전히 꽂혀 있다. 맑고 수더분하다.

     

    밤새 그늘진 집안이 햇살을 끌어당긴다. 내 몸에 햇살 한줌이 스며들어 잠이 쏟아 질것만 같다. 무미건조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맴돌다 간만에 접해보는 그럴듯한 여유다. 자유로움을 느끼며 베란다 넓은 창가에 내어둔 등나무의자에 기대어본다. 등나무 의자에서, 오랫동안 길들여진 편안한 냄새가 난다. 언제나 나에게 쉴 자리를 내어주는 등나무 의자와의 인연도 꽤 오래되었다.

     

    몇 해 전에 대구에서 새로운 이웃이 10층으로 이사를 왔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너부러진 이삿짐 속에서 등나무 의자 하나가 비를 맞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아련해지는 듯 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인터폰 신호음에 수화기를 들었더니 10층 이웃이었다. 이사 올 때 도배를 하지 않아 후회가 된다는 말에 넋두리를 섞더니, 거실에 둔 등나무 의자를 버려야겠다는 것이었다. 이웃의 걸걸한 목소리와 다르게 그 집 현관문을 들어서면 정감 가던 의자였기에 우리 집에 두고 싶다했더니 그래요 하며 반가워했다. 답답한 것을 싫어해서 집을 넓고 편하게 쓰고 싶어 하는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의자를 집 베란다로 옮겨왔다. 남편은, 베란다를 다 채울 만큼 크고 칙칙하게 덧칠된 낡은 의자에 탐을 내는 아내의 행동을 탓하지는 않았다.

     

    문뜩 머릿속은 등나무 의자에 머무는 기억으로 실타래가 풀려 나갔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나 물건 속에서 과거를 떠올리기도 한다. 나에게도 등나무 의자는 희망을 버린 아버지의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88년 여름, 국회위원 선거를 앞두고 당의 공천 심사가 있을 무렵이었다. 정국(政局)은 술렁거리고 있었고 어수선 했다. 교직에 몸담고 계셨던 아버지는 어수선한 정국을 한탄하시며 평생 이루고자 했던 정치 참여에 뜻을 두시고 준비 중이셨다.

     

    아버지의 형제 세분 중 두 분이 정치에 뜻을 두셨는데 나의 큰아버님이 두 번의 선거를 거치는 동안 아버지는 동생이 형보다 먼저 정치에 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당신이 뜻한 바를 미루어야 했다. 긴 시간을 보내고 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서야 아버님은 공천을 받기위한 절차를 준비하고 계셨다. 그러나 지병과 무리한 일로 인한 과로가 겹쳐 아버님은 결국 뜻을 펴 보지도 못한 채 자리에 몸져눕고 말았다. 아버님의 절망감과 함께 가족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자리에 누운 지 한 달 만에 아버님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가르침을 주시며 가치 있게 사는 길을 일러주신 아버지는 옳은 일에는 뜻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분이셨다. 그러나 돌아가시기 전 두 달여 동안 아버지가 의지한 것은 가족 어느 누구도 아닌 등나무 흔들의자였다. 자식들에겐 단 한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등나무 흔들의자는 당신의 지친 육신을 쉬게 한 마지막 휴식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등나무 의자는 안방을 지키고 있었다.

     

    49제를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주말이라 고향으로 내려갔더니 어머니의 눈에 핏발이 서 오빠에게 몹시 화를 내고 계셨다. 평생 어머님께서 노여워하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겁이 났지만 자초지종을 들어야 했다. 의자를 보며 빈방에 홀로 앉아 눈물을 흘리고 계신 어머니를 오빠는 보고, 의자를 마당뒤편으로 내어 놓았고, 어머니는 의논하지 않고 의자를 내어놓은 사실에 화가 났던 것이다. 오빠를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의자를 보며 아버지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오빠는 그런 어머니를 늘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 어머니는 며칠 동안 의자에 앉아 아버지를 상상 하시는 듯 했다. 그런데 얼마지 않아 아버지를 대신해 거실한쪽을 지키고 있던 등나무 의자는 집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의자에 대한 이야기는 가족 누구도 묻지 않았다.

     

    이제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부모의 마음으로 돌아가 자식들을 내보내고 아버님의 흔적과도 같았던 등나무 의자를 버릴 수도, 둘 수도 없었던 어머니의 혼란스러웠을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을 듯 하다. 분명 어머니는 의자를 내어 놓으시며 아버지에 의지하신 긴 세월을 버리시고 당당한 엄마의 모습으로 다섯 남매의 무게를 짊어지고 나갈 준비를 하셨을 것이다. 또한 어린 자식들에게 버리는 것이, 아픔이 아니라 가슴에 묻어 두는 연습임을 인식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베란다에 등나무 의자가 한가롭게 놓여 있다. 창가 햇살이 등나무 의자 길게 드리운다. 잠시 일상에 젖은 내 힘든 어깨를 등나무 의자 깊숙이 눕혀 본다. 아버지의 품속 같다. 아버지의 주름진 손끝에서 전해지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아버지가 흔들어주는 등나무 의자에서 어느새 잠이 들었었나보다. 햇살이 너무 밝다.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우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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